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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관이 세 마리라고 아뢰자 왕은 그의 점이 허무맹람하여 화를내며 형관을 불러서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미디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에만 활용하도록 허가받은 자료로서, 미디어 자유이용(다운로드)은 불가합니다. 김홍도는 풍속화에서 서민의 희로애락을 은유와 풍자로서 엮어 내어 생명감 넘치는 세계를 보여 주었다. <타작>(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면, 경직 표현을 넘어선 칼날 같은 풍자가 돋보인다. 웃음을 함빡 머금고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과 웃음과 마름의 흐트러진 자세를 통해서 계급간의 불공평한 관계를 극화시켜 표현하였다. 사대부 화가들의 선구자적인 노력은 18세기 후반 직업 화가인 화원들에 와서 비로소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조선 후기의 사회는 18세기 이후 기존의 신분제가 이완되어 나갔고, 민중사회의 성장이 확인된다. 17세기 장기간에 걸친 기근과 전염병의 피해가 주기적으로 반복됨에 따라 국가에서도 각종의 사회제도 개혁을 뜻하는 변통론들이 제기되어 변화를 촉진시키고 있었다. 그와 같은 변화는 대략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나타난 共同納의 관행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 공동납의 관행 아래에서는 면리 단위로 조세를 부담할 호구수의 총액 즉 戶摠과 口摠이 정해졌고, 이에 근거하여 각종의 조세가 개개인이 아닌 각 면리에 공동으로 부과되었다. 이 새로운 부세징수 방식으로 말미암아 부세의 기준인 호구총수가 정해진 이후에는 호적 기재상의 직역 표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18세기 전반 이후 신분별 호구 비율의 급격한 변동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 화원(畵員) 화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인 이는 세종 때 안견(安堅)이었다. 그는 특히 안평대군(세종의 셋째 아들)의 후원을 받아 수백 점의 그림을 창작했는데,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년)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신숙주가 쓴 화기(畵記)에 따르면, 그의 화풍은 중국과 한국의 역대 화법(畵法)을 깊이 연구하고 장점을 절충하여 자기 독자의 경지를 개척했는데 산수(山水)를 특히 잘했다고 한다. 〈몽유도원도〉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평화로운 꽃동산을 웅장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묘사한 것으로, 이상사회를 동경하는 작가와 후원자의 꿈이 서린 작품이다. 산을 그린 기법에서 북송(北宋)의 화가 곽희(郭熙)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 안에 펼쳐진 농촌풍경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안견은 학식도 높아 벼슬이 호군(정4품)에까지 올라, 같은 시기에 인물화를 잘 그려 벼슬이 당상관(정3품)에까지 오른 최경(崔涇)과 더불어 화원으로는 가장 우대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보빙사를 따라 조선에 온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1884년 1월 조선 관리의 초대를 받고 조선의 최신 유행인 석식 후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 황제가 이 커피와 와플 등 서양식 디저트를 최초로 먹었다고 알려진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고종이 커피를 먹었다고 알려진 시기는 1895년 아관파천 당시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를 찾기 어려우며 기록에 따르면 고종 황제 전에 커피를 즐긴 조선시대 인물은 여럿 있다.


또한 이왕 첫 정을 바칠 바에는 용렬한 사내에게 정을 주느니 통이 큰 사내에게 정을 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홍도는 2대에 걸쳐 왕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경상북도 안기(현재 안동시) 찰방과 충청북도 연풍 현감 벼슬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중인 출신의 인사들이 지방관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간혹 있긴 했지만 화가로서 지방관이 된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8년 하계 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 역시 호랑이 캐릭터이며, 2018년 동계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수호랑도 호랑이를 채택하였다. 일본의 우두머리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에요. 조선의 발전과 함께 자리를 잡아가던 도자기 생산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어요. 많은 도공들이 일본군에게 잡혀 끌려갔고, 전국의 많은 가마들이 파괴되었어요.


또한, 윤두서보다 좀 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삶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말징 박기는 말의 발굽에 징을 박는 모습을 그린것이고, 소 젖짜기는 말 그대로 소젖을 짜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갓을 쓰고 젖을 짜는 모습도 이채롭고, 자기가 먹을 젖을 빼앗기는 것이 억울한 듯 어미소를 보고 울고 있는 송아지의 모습도 재밌습니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부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는 시기까지를 군정기 또는 해방정국이라 한다. 북에서는 조만식과 같은 우익 인사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남에서는 여운형과 같은 중도 좌파 정치인이 암살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소련과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한국에서의 극심한 반대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폐기되었다.


그것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으로, 송의 사절인 서긍(徐兢)이 한 달 남짓 개성에 머물면서 고려에 대한 그의 견문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글로 남긴 책만 남아 있고,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불화에도 풍속 장면이 담겨져 있어 당시 풍속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예조 소속의 속아문은 예조가 관장하는 업무의 다양함으로 인하여 매우 방대하다. 국가의 각종 행사와 궐내에서 소용되는 얼음을 관리하던 빙고, 왕실 행사의 기록화나 왕실 사람들의 초상화를 담당했던 도화서, 궁중의 약재 공급을 맡은 전의감도 예조 소속이었다. 홍문관・예문관・춘추관・승문원에서는 외교 업무에 필요한 문서 작성을 담당하였고, 통례원・예빈시는 사신을 접대하고 통역하는 업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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